노르웨이 여행-12 (베르겐외곽 그리그의 집) ...
북유럽 5개국 여행을 떠나기 전 여행사에서 작성한 일정표를 보면서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12일 일정중에서 노르웨이 여행일정이 4일간이나 차지하고 있는데 대한 의문이었다. 상대적으로 더많이 알려진 덴마크, 스웨덴, 러시아등에 많은 시간이 할애되어야 마땅하지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지금의 시점에서 생각할 때 노르웨이에서 비교적 오랜 시간을 머무룰 수 있었음에 내심 만족하고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림속에서 밋밋한 구릉지대로만 이어지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스릴 있는 험악한 산악여행으로 때묻지 않은 순수한 자연과 만날 수 있었고, 시간을 초월한 듯 몇만년전의 전설과도같은 지구의 흔적들과 조우할 수 있었으며, 험난한 자연과 싸워가면서도 세계적인 예술가들을 길러내고 문화의 향기를 꽃피워낸 세계제1의 복지국가 , 위대한 바이킹의 후예들을 만나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촬영일시 : 2008년9월20일 도움말 주신분 : 오슬로교민 심미영씨>
베르겐시 외곽에 위치한 '그리그'의 집에 이르는 진입로와 안내표지판
그리그의 집 바로 앞에 설치해놓은 브로마이드 작품
이 집은 베르겐시 교외에 자리잡고 있는 멋진 스위스 풍 건물로 작곡가 그리그(1843~1907)의 집이었다. 이 집은 ‘트롤이 사는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트롤하우젠(Troldhaugen)이라는 이름을 갖고있다. 그리그는 노르웨이가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로 '페르귄트조곡' '노르웨이의 농민무용' '제3바이올린소나타'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리그 는 1885년부터 1907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매년 여름 이곳에서 작품활동을 하였다한다. 겨울에는 역시 유명한 소프 라노 가수였던 아내 니나와 함께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휘자로서 피아니스트로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지금은 그리그가 살던 이 집과 작업실뿐 아니라 작은 규모지만 콘서트홀, 그리그 부부의 무덤 등을 갖춘 문화 공간으로 노르웨이 국민들과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이집은 그리그 부처가 죽고난 후 다른 사람에게 팔렸었으나 베르겐시가 비싼값을 주고 재구입하여 현재 처럼 박물관 으로 꾸미고 관리한다고 한다. 밀려드는 관람객들로부터 소장품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많은 인원이 배 치되어 있으며 실내에서의 카메라 촬영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어서 아쉽지만 소장품등의 촬영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본관인 박물관은 그리그의 유품이 방마다 가득히 진열돼 있었다. 그가 쓰던 가구와 집기, 손때 묻은 악보와 편지, 평생동안 지인들로부터 받은 선물과 초상화, 친구를 초대해서 파티에 썼던 화려한 접시받이도 전시돼 있었다. 그리고 그가 늘 지니고 다녔다는 마스코트 두꺼비도 보였다. 벽에는 많은 사진들이 걸려있었고 거실 중앙벽에는 대형 그림이 붙어있었는데 이집 정원에서 몇명의 아이들이 밖으로 뛰쳐나가는 사실적인 그림이었다. 설명하는 이의 말에 의하면 이 그림은 두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간 딸 크리스티나 때문에 늘 괴로워했던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서 그리그의 친구가 그려서 증정했다고 한다. 예술적으로도 성공했고 재정적으로도 부유했던 그들 부부이 지만 슬픔과 괴로움이 운명처럼 항상 그들 곁에 머물러 있었던것은 아닐까? 벽에걸린 사진들의 표정이 매우 어둡고 침울해 보였다.
1843년 베르겐에서 태어난 그리그는 어릴때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것을 계기로 음악가의 길을 걸었다. 입센의 극시인 페르귄트에다 곡을 붙인 '페르귄트 모음곡'이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1876년 초연된 페르귄트는 그리그로 하여금 음악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만들었다. 그리그는 사촌누이인 니나와 결혼한지 18년만에 베르겐 에 서 경치좋은 이곳을 골라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이토록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살면서 많은 음악을 작곡했다고한다.
그가 혼자 틀어박혀 작곡에 몰두했다는 오두막 작곡실
베르겐은 ‘인형의 집’의 극작가 입센과도 인연이 깊다. 베르겐 출신은 아니지만 베르겐 국립극장의 전속작가 겸 무대감독으로 활동하면서 극작가로 성공하는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 그의 대표작으로는 1866년에 발표한 브랑, 1867년에 발표한 페르귄트, 1879년에 발표한 인형의 집 등이 있다. 노르웨이의 미술을 대표하는 표현주의화가 뭉크 역시 베르겐과 깊은 인연이 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절규'는 베르겐의 피오르드를 산책할 때 얻은 영감 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본관건물 바로 옆에 있는 콘서트홀
지붕은 노르웨이 시골집의 전통 양식에 따라 풀을 키우고 있었다. 전망창 : 예술가들은 고집이 세다고 한다. 노르웨이의 혹독한 추위가 이어지는 기나긴 겨울때문에 일반적으로 창들 은 작게 설치하는것이 관례인데 그리그는 바다가 보이는 전망만을 위하여 건축가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이렇듯 시원 하게 바다가 보이는 전망창을 만들도록 지시했다한다. 2층인 본관건물의 층고도 다른건물들과는 비교되지 않게 높았다.
문이 굳게 잠긴 콘서트홀 내부를 유리창 너머로 바쁘게 한 컷! 임자없는 의자들만이 이 방의 용도를 말해준다.
만년의 그리그 부부 초상
그리그가 작곡한 페르귄트 모음곡이나 피아노 협주곡들은 노르웨이 국민은 물론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우리들에게 너무나 친숙해진 페르귄트 모음곡중 “솔베이지의 노래”는 노르웨이의 정서와 함께 역사 적으로 한많은 우리 여인들의 애절한 정서에도 부합되어 계속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Solveig's Song (솔베이지의 노래) 작곡 : Edvard Grieg (1843~1907, 노르웨이)
1. 그 겨울이 지나 또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
그 여름날이 가면 더 세월이 간다, 세월이 간다.
아! 그러나 그대는 내 님일세, 내 님일세.
내 정성을 다하여 늘 고대하노라, 늘 고대하노라.
아~~아~~아 ....
2. 그 풍성한 복을 참 많이 받고, 참 많이 받고,
오, 우리 하느님 늘 보호하소서, 늘 보호하소서,
쓸쓸하게 홀로 늘 고대함 그 몇해인가?
아! 나는 그리워라, 널 찾아 가노라, 널 찾아 가노라.
아~~아~~아 ....
< 노르웨이의 어느 산간 마을에 가난한 농부 페르귄트가 살고 있었고 같은 동네에 아름다운 소녀 솔베이지가 있었다.
둘은 사랑했고 결혼을 약속했지만 가난한 농부였던 페르귄트는 돈을 벌기 위해 외국으로 떠난다.
갖은 고생 끝에 돈을 모아 고국으로 돌아오다가 국경에서 산적을 만나 그동안 번 돈은 다 빼앗기고 고생 끝에 겨우 고향으로 돌아오지만...고향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살던 초가집에 서는 사랑하는 연인 솔베이지가 어머니 대신, 백발노인이 되어버린 페르귄트를 맞는다.
병들고 지친 페르귄트는 연인의 무릎에 머리를 누이고 눈을 감는다. 솔베이지는 꿈에도 그리던 연인 페르귄트를 안고 '솔베이지의 노래' 를 부르며 솔베이지, 그녀도 페르귄트를 따라간다.>
그리그의 집 옆 산책길 모퉁이에 세워진 에두아르드 그리그의 동상 그는 150cm밖에 안되는 단신이었다고 한다. 거기다 평생 지니고 살아온 폐결핵으로 한쪽 어깨가 축쳐져 늘 삐딱한 자세를 지녔다고 한다. 그의 사랑하는 연인인 사촌동생 니나와의 결혼에는 양가 모두가 반대했었고- 예술적으로는 거인이었지만 인간내면의 고통은 누구 보다도 병약한 그를 짓눌렀을 것이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는 정들었던 이 집의 입구, 단단한 암석에 다이너마이트를 사용, 굴을 파고 매장됐다고 한다. 그는 오래 전에 이곳에 잠들었지만 그의 가녀린 멜로디는 이곳을 찾는 뭇사람들의 귓전에 계속 울려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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